요즘은 여러장르의 음악을 주로 듣고 있어요
차로 이동하는시간들이 많아서
이런저런장르를 듣고있죠
몰랐던 음악은 좀 찾아보면 어떤 장르인지 쉽게알수있습니다
역시 우물안 개구리였음..ㅋㅋㅋ
오늘은 지난시간에 이어서 조선시대대 대표적인 음악에대해 알아볼까합니다
▶보태평과 정대업
《보태평》은 선왕의 문덕(文德)을, 《정대업》은 그 무공을 각각 한문으로 칭송한 것이고
음악은 고취악에 기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정대업》 중의 화태(和泰)와 순응(順應)의 음악은 각각 고려 때의 〈서경별곡〉과 〈만전춘〉의 곡에서 차용하였습니다.
《보태평》 11곡은 모두 임종궁(林鍾宮)의 평조(平調)이고, 《정대업》 15곡은 모두 남려궁(南呂宮)의 계면조(界面調)입니다. 원래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 때 연례(宴禮)에 연주되었는데, 세조 9년(1464)에 이르러
향악이 아악 대신에 종묘제향악으로 채용되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짧은 제향(祭享) 절차에 맞게 개혁된 종묘악이 비록 후세에 그 리듬은 변개되었지만
조선 말까지 약 500년간 계속되었다.
▶발상
〈발상〉 11곡은 가사가 한문으로 되었고 그 음악도 당악같이 6음계로 되었는데, 이 고취곡(鼓吹曲)은 세조 때 폐용되었는지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용비어천가
한글이 1443년에 창제되었고, 1445년에는 조종(祖宗)의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을 가영(歌詠)하고
후손에게 경천근민(敬天勤民)을 명심케 하는 <용비어천가> 125장을 한글로 지었고,
<치화평(致和平)>과 <취풍형(醉豊享)>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치화평>과 <취풍형>이 각각 125장의 악보를 모두 기재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중에서 <치화평> 3기(三機)의 첫 16장과 졸장(卒章)만 연주하고,
<취풍형>의 첫 8장과 졸장만 연주하였습니다.
<대악후보>의 <치화평> 1·2기(機)의 경우에는 첫 3장만, 3기의 경우에는
첫 16장만 기보(記譜)되었고, <취풍형>의 경우도 첫 8장만 기보되었습니다.
▶여민락
<용비어천가>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125장 중에서 첫 4장과 종장만을 떼어서 가사를 중국계의 고취곡에 붙여서,
그것을 <여민락>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치화평>과 <취풍형>은 오늘날 연주되지 않고, <여민락>만은
비록 그 가사를 부르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관현합주로 연주됩니다.
<봉황음(鳳凰吟)>(林鍾宮 平調)과 <만전춘(滿殿春)>(林鍾宮 界面調)은 <처용가(處容歌)>의 속된 가사를
묘정정악(廟廷正樂)의 것으로 개찬한 것입니다.
▶세종실록의 악보
〈보대평〉, 〈정대업〉, 〈발상〉,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봉황음〉, 〈만전춘〉 등 세종 때 음악이
《세종실록》 제 136권~제147권에 악보를 남기고 있는데, 그 악보는 1행 32정간(井間)으로 되었고,
그 정간은 시간 단위를 표시하여, 그것이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최고(最古)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이고,
서양의 오선지보다 약 2백년 늦습니다.
그 1행 32정간이 세조에 의하여 1행 16정간 2행으로 개서(改書)되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16정간이 대부분 20정간으로 변하여진 채로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세종의 정간보는 기보법 사상 획기적인 것입니다.
《세종실록》 악보에는 〈회례악〉, 〈제례악〉, 〈보태평〉, 〈정대업〉, 〈발상〉, 〈봉래의〉, 〈전인자〉,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후인자〉, 〈봉황음〉, 〈만전춘〉 기타 종묘사직 등의 제례악이 실려 있습니다.
▶세조실록의 악보
《세조실록》 48권~49권에 실린 악보입니다.
《세종실록》 악보는 1행 32정간이나 《세조실록》 악보는 1행 16정간으로 축소되었고,
3·2·3·3·2·3정간으로 갈라 6대강(六大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16정간 6대강법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세종실록》은 율자보로 되었으나 《세조실록》은 오음약보(五音略譜)로 되었고
당악에서 쓰던 공척보(工尺譜)를 병용하였다. 《세조실록》 악보에는 〈보태평〉, 〈정대업〉 등
종묘제례악과 원구제악이 실려 있습니다.
▶안상금보
선조 5년 안상이 편찬한 악보로 일명 <금합자보(琴合字譜)>라 합니다.
편장 안상이 명종 16년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 되어
악사 홍선종(洪善終)·악공 허억봉(許億鳳)·이무금(李無金)과 함께 이 악보를 편찬하고 선조 5년에 책을 낸 것입니다.
거문고의 오음약보·합자보 및 육보(肉譜)와 노래와 사설을 적고
피리의 오음약보 및 육보·장고악보를 곁들여서 총보(總譜)를 만들었습니다.
이 악보에는 <만대엽(慢大葉)>, <정석가(鄭石歌)>, <북전(北殿)>, <사모곡(思母曲)> 같은
고가요(古歌謠)가 실렸는데, 조선 후기에 크게 성했던 가곡의 실마리가 되는 <만대엽>, <북전>의 최고 악보로서
조선 전기음악과 후기음악을 비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고 전형필(全瑩弼) 소장으로 보물 제28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시용향악보
임진란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저자를 알 수 없는 고판본(古版本) 악보. 6·25전쟁 후에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세조실록> 악보와 같이 6대강 16정간에 오음약보로 되었습니다.
4행을 한 묶음으로 하여 제1행은 오음약보, 제2행은 장고의 악보, 제3행은 박(拍)의 악보,
제4행은 악곡의 사설을 적었습니다.
이 악보에는 <사모곡>, <서경별곡>, <청산별곡>, <귀호곡(歸乎曲-가시리)> 등 많은 고려가요와
<납씨가> 등 조선 초기의 악가와 <성황반(城隍飯)>, <내당(內堂)>, <삼성대왕(三城大王)>, <대국(大國)> 등
10여곡의 무속가요가 있어서 고려 향악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악보의 발견으로 20여곡의 고가요가 새로 알려진 것입니다.
원본은 이겸로(李謙魯)가 소장하고 있고 1954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영인본이 나왔습니다.
▶음악 서적-악학궤범
조선 성종 때(1493) 성현이 주가 되어 찬술한 9권으로 된 종합악서입니다.
이 악서는 제1권에 악(樂)의 원리, 제2권에 악기진설도설(樂器陳設圖說),
제3, 4, 5권에 정재도설(呈才圖說), 제6, 7권에 악기도설(樂器圖說),
제8, 9권에 의물(儀物), 관복도설(冠服圖說)을 자세히 기술하여 한국에서 최초로 독립된 악서(樂書)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박연이 악서 찬집을 제의하였지만 실현치 못한 것 같고,
<세종실록> 128권에 악기도설과 악현도가 일부 게재되었으나 <악학궤범>같이 전반적인 것이 못됩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악사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악기가 파괴되었어도,
잿더미에서 구출된 <악학궤범>으로 인하여 악기를 제조하고, 음악의 고제(古制)를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고악 복구에 불가결한 <악학궤범>은 초간 이후 광해군(光海君)·효종(孝宗)·영조(英祖), 1933년, 1968년 등
여러 번 복각(複刻)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한국의 문화는 큰 시련을 당하여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조선의 음악도 이 때를 계기로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전기에 힘써 갖추어 놓았던 아악은 난리통에 흩어졌습니다.
후에 문물이 바로잡히자 아악을 재건하였으나, 규모는 훨씬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조선 전기 음악에 많이 전하던 고려조의 향악과 송의 사악은 대부분 상실되었거나 변질되었습니다.
당악은 향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명맥을 유지한 <영산회상>, <보허자> 가곡(<만대엽>) 같은
악곡은 많은 변주곡을 낳아서 조선 후기의 향악곡의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영산회상>은 방대한 기악 모음곡으로 되었고, 가곡·가사·시조는 많은 종류가 생겼습니다.
한편 영조 이후에는 서민문화의 대두에 따라 판소리·산조·잡가와 같은 민속음악이 생겨 민간에 유포되었습니다.
▶특징
조선 후기 음악은 민간음악의 대두와 해학적인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시(漢詩)에 대가 되는 우리말의 <청구영언>, <구운몽>에 대가 되는 향토색이 짙은
<춘향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그림에 대가 되는 단원(檀園) 김홍도 및 혜원(惠園)
신윤복의 풍속도의 특징과도 같습니다.
▶당악과 향악의 상호변화
당악도 세종 때의 <대악전보(大樂前譜)>에는 14곡이 기보되었지만, 조선 후기의 <속악원보(俗樂源譜)>에는
겨우 <보허자>와 <낙양춘> 2곡밖에 없고, 그 두 곡만이 당악으로 지금도 연주되고 있습니다.
그 <보허자>도 <대악후보>에는 1행 16정간으로 기보되었는데,
<속악원보>에 이르러서는 1행 20정간으로 기보되어서, 리듬에서 변화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특히 <보허자>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원음(元音) 사이에 간음(間音)이 점점 들어가서,
당악인지 향악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지경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종 때만 하더라도 당악기는 서쪽에, 향악기는 동쪽에 따로 분리되어서 당악과 향악이 교대로
연주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당악기와 향악기의 합주로 되어 버려, 당악과 향악을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 향악도 <대악전보(大樂前譜)>에 실린 세종 때 된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봉황음(鳳凰吟)>,
<만전춘(滿殿春)>은 물론 <대악후보>에 실린 <진작(眞勺)>, <이상곡(履想曲)>, <납씨가(納氏歌)>, <횡살문(橫殺門)>, <서경별곡>, <한림별곡(翰林別曲)>, <쌍화점(雙花店)>, <자하동(紫霞洞)> 등 많은 곡이 조선 후기에는 없어지고,
그 중에서 겨우 <감군은(感君恩)>, <만대엽(慢大葉)>, <북전>, <동동(動動)>, <정읍(井邑)>, <영산회상>이 남았다가,
<감군은>, <만대엽>, <북전>은 조선 후기 늦게 없어져서 지금에 전하지 않고, <동동>, <정읍>, <영산회상> 등만
지금도 연주되는데, 그것도 <대악후보>의 곡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없도록 변해 버렸습니다.
<보허자> 같은 당악이 원음에 간음을 추가하여 향악화한 것과 같이, 또 향악도 당악의 스타일로 접근하였습니다.
즉 <정대업(定大業)>의 혁정(赫整)은 원래 향악이어서, <대악후보>에서는 1정간(井間), 2정간, 3정간, 5정간같이
불규칙한 시가(時價)의 음으로 되었는데, <속악원보>에 이르러서는 균일하게 1정간의 음으로 되어,
그 음악은 중국 음악의 스타일에 가까워졌습니다.
또 <정읍>, 일명 <수제천(壽齊天)>도 당악의 <낙양춘>만큼이나 한음 한음을 느릿느릿한 템포로 연주하면서
향악에 독특한 꾸밈음(裝飾音)과 연음(連音)을 지녀서, 그전의 악보에서는 볼 수 없는 위엄을 새로 갖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조선 후기의 궁중에서는 향악도 중국 고전악같이 완서하고 위엄있게 연주하도록 정부가
신칙(申飭)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음악이 점점 빨라지는 데다가 가사도 해학적인 경향으로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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