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

한국음악-발전및계승(고려시대,조선시대)

오늘도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아이 학교보내고 청소하고 ㅋㅋㅋㅋㅋ

이젠 집안일도 같이 나눠서 해야하는시대이니까요

이젠 익숙합니다

오늘은 고려시대랑 조선시대 한국음악에대해 알아볼까합니다

 

1. 고려 시대

고려를 창건한 태조(太祖)는 신라의 고풍을 많이 답습하였습니다.

화랑 또는 선랑(仙郞)이 천령(天靈)과 오악(五嶽)·명산대천(名山大川)·용신(龍神)·신기(神抵)에

국가 태평을 비는 팔관회(八關會)와 불교의식인 연등회(燃燈會)가 그 일례입니다.

이 두 가지 의식은 향악과 당악뿐만 아니라 백희(百戱)까지도 포괄한 대규모 의식으로,

그 음악들도 의식과 함께 신라의 것을 답습하였습니다.

신라풍의 사뇌가(詞腦歌)는 균여(均如, 917-973)에 의하여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종, 의종(毅宗)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유풍(화랑 따위)이 많이 쇠퇴하였습니다.

예종 때에는 송나라로부터 아악이 도입되었고,

또 송의 사악(詞樂)이 들어와 신라 때 들어온 당의 음악을 밀어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향악은 고려에서도 계승되었고 새로 많은 향악곡이 생겨

그 일부는 조선 때까지 전승되었습니다.

 

▶팔관회

명산대천·용신을 가무로 희열시켜 복을 비는 제도로 신라 국선의 유풍(遺風)입니다.

연등회와 더불어 고려의 큰 국가의식의 하나로 궁중의 구정(毬庭)에 다섯길이나 되는 무대를 세우고

사선악부(四仙樂部) 및 용·봉·상(象)·마(馬)·차(車)·선(船)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춤을 비롯하여 가무백희가 행해졌습니다.

이 팔관회는 고려 초기에 극성기를 이루었고, 그 후 쇠퇴하기는 했으나

고려 말기까지 계속하다가 근세조선에 와서 철폐되었습니다.

 

송의 사악의 성행

송의 음악이 고려에 들어와 신라시대에 들어온 당(唐)의 음악을 밀어냈습니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실린 당악(唐樂)이란 것은 사실 전부 송의 사악입니다.

사(詞)라는 것은 장단구(長短句)라고도 칭하듯, 시의 매행(每行)이 균일적으로 칠언(七言)으로 되어 있지 않고,

7언·5언·7언·6언과 같이 길고 짧습니다.

그러나 그 불규칙적인 길이의 가사에 붙여진 음악의 길이만큼은 규칙적으로 8행(井間譜로)입니다.

<고려사>의 '악지'에 실린 사(詞) 41수 중에서 8수가 중국시인 유영(柳永, 11세기)의 작으로 판명되었는데,

그 판명으로 사가 대개 11세기 이후에 고려에 들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詞)의 하나인 낙양춘(洛陽春)의 가사가 <고려사> 악지에 실려 있고,

구양수(歐陽修, 1007-1072)의 작으로 판명되었는데, 4행 1구(尾前詞와 尾後詞)로 되었습니다.

또 한편 낙양춘의 악보는 18세기의 <속악원보(俗樂源譜)>에 실려 있는데,

사(詞) 1행(5자-7자)이 규칙적으로 정간보의 8행에 들어 있고,

그 정간보 8행은 제4행과 제8행에 들어가는 박(拍)에 의하여 둘로 나뉩니다.

위에서 ○표는 그 선행가사가 ○표가 달리지 않은 가사의 2배의 시가(時價)를 가진 것을 표시합니다.

이 악보에 의하면, 중국의 사악(詞樂)은 대개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 syllabic)이고

간주곡(間奏曲)과 후주곡(後奏曲)을 갖지 않은 것을 특색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향악

고려조의 향악은 <고려사>의 '악지'에 29곡에 보여주는데,

그 중 오관산(五冠山)·거사련(居士戀)·처용(處容)·사리화(沙里花)·장암(長岩)·제위보(濟危寶)·정과정(鄭瓜亭)의

7곡은 이제현(李齊賢, 1288-1367)에 의하여 한문으로 역시(譯詩)되어 있어

그것들이 13세기 이전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의 시가(詩歌)는 한시가 4행임에 비하여 3행 또는 5행과 같이 기수(奇數)의 행을 가진 것이 주목됩니다.

그리고 음악에서는 그 1행에 두 박이 들어갑니다.

3행(行)의 예 귀호곡(歸乎曲-가시리) 가시리 가시리 /이꼬나난 바리고 가시리 /이꼬나난 위 중즐가

/大平盛代 5행(行)의 예 청산별곡(靑山別曲) 살어리 살어리 /라ㅅ다 청산의 살어리

/라ㅅ다 멀위랑 다래랑 /따 먹고 창신의 살어리랏다/얄리얄리 얄라 /얄라성얄라 <대악후보(大樂後譜)>와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의하면, 향악은 대부분 일자수음식(一字數音式)이어서(예: 西京別曲)

중국음악의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의 아정(雅正)한 것에 비하여 염려(艶麗)한 것을 특색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 향악이 중여음(中餘音, 間奏)을 가진 점에서도 중국음악과 다릅니다.

고려조의 향악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관현 반주를 가진 노래는 간주와 후주 같은 발달한 형식으로 되었고,

또 일자수음식이라서 염려(艶麗)하여 이런 점에서 고려청자의 화려한 것에 비할 수 있겠습니다.

 

고려향악의 악보

<고려사> 악지에 그 명칭이 적힌 많은 향악곡은 대부분 악보는 물론 사설도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그 일부는 조선 때까지 전승되어 악보와 사설이 남은 것이 있습니다.

<고려사>에 명칭이 있는 것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동동(動動)·서경별곡(西京別曲)·자하동(紫霞洞)·

한림별곡(翰林別曲)·풍입송(風入松)·정과정(鄭瓜亭) 등입니다.

이 밖에 고려향악곡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악보가 전하는 것은

사모곡(思母曲)·쌍화곡(雙花曲)·정석가(鄭石歌)·청산별곡(靑山別曲)·유구곡(維鳩曲)·가시리(귀호곡, 歸乎曲)·

상저가(相杵歌)·야심사(夜深詞)·만전춘(滿殿春)·정읍(井邑)·이상곡(履想曲)·

봉황음(鳳凰吟)·북전(北殿) 등의 악보가 전합니다.

이들 악곡은 오늘날 거의 전승되지 못하고 끊어졌으나 풍입송·서경별곡·만전춘은

조선의 제례악에 편곡되어 이 악곡만은 지금도 연주되고 있습니다.

 

향악정재와 당악정재

정재(呈才)란 궁중무용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고려 때에 쓰던 정재에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향악정재와 중국에서 들어온 당악정재가 있는데,

그 제도가 다르다. 당악정재에는 포구락(抛毬樂)·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오양선(五羊仙)·

연화대(蓮花臺) 등이 있는데, 포구락을 예로 들면 죽간자(竹竿子-정재에 쓰이는 도구로

긴 나무 막대기의 한쪽 끝에 가는 대 100개를 꽂았다)를 든 여기(女妓) 2인이 관현반주(管絃伴奏)

전인자(前引子)에 맞추어 입장하여 서면, 동시에 음악이 그치고 죽간자가 무반주로 한문으로 된 구호를 부릅니다.

다음에는 무기(舞妓)들이 관현반주로 춤추며 들어와서 서면,

음악이 그치고 무기들은 무반주로 한문의 창사(唱詞)를 부릅니다.

이어서 관현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나서 용알을 구문(毬門)의 구멍으로 던져넣습니다.

용알 던지기가 끝나면 죽간자 2인이 관현반주(後引子)에 맞추어

나와 무반주로 '구호'를 부르고 나가고 뒤이어서 무기가 나갑니다.

이같이 당악정재는 죽간자의 입퇴장과 음악(전인자와 후인자)과

구호 및 무기들의 무반주의 창사를 그 특징으로 합니다.

향악정재는 동동(動動, 牙拍)·무애무(無▩舞)·왕모대무(王母隊舞) 등이 있는데

동동을 예로 들면 무기 2인이 들어와서 엎드려 있으면서 음악에 맞추어 동동의 첫구,

즉 덕과 복을 드리는 노래를 부르고 나서 일어나서 관현악과 제기(諸妓)의 합창에 맞추어서 춤을 춥니다.

춤이 끝나면 무기는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퇴장합니다.

이같이 향악정재는 당악정재에 보이는 죽간자의 인자(引子)와 구호가 없고 창사처럼

무반주로 무기가 노래하지 않고, 신라시대의 무척(舞尺)·금척(琴尺)·가척(歌尺)과 같이

고려시대의 향악정재도 무기·관현반주·여성합창(女聲合唱)의 3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을 특징으로 하였습니다.

2. 조선 시대

세종, 세조 때에는 아악이 박연에 의해서 정리되고,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악기를 직접 만들어 썼으며, 정간보, 오음악보등에 의한 기보법이 창안되고,

아악보가 편찬되었다. 세종대왕은 정대업, 보태평 등을 직접 작곡하였습니다.

인조 21년에는 사직과 문묘제례악이 정해지고, 인조 25년 아악을 다시 쓰게 되었으며,

광해군, 효종, 영조 때, 악학궤범을 복간하고 악기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종묘제례악과 삼현 육각에 의한 음악이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가곡, 가사, 시조 등의 성악곡이 널리 불렸다. 특히 영조 이후, 일반 백성들에게서

판소리, 산조, 잡가 등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숙종 때의 판소리 체계화는 큰 발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운 뒤 억불양유(抑佛揚儒) 정책에 따라

예악(禮樂)을 국시(國是)로 삼았습니다.

정도전 등은 건국과 더불어 많은 조선의 창업송가(創業頌歌)를 지었으나,

악곡은 고려조의 음악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츰 제도가 정비되고 유교가 대흥한 세종 때에 이르러 전조(前朝)의 음악을 많이 개산(改刪)하였습니다.

세종은 박연을 시켜 아악을 정비하고 율관과 악기를 제작하였고,

향악과 고취악(鼓吹樂)에 기하여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을 만들고 〈여민락(與民樂)〉,

〈치화평(致和平)〉 등을 제정하였으며, 유량악보(有量樂譜)인 정간보를 만들어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실었습니다.

세조는 부왕(父王)의 음악사업을 이어받아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악에 쓰게 하여

오늘날까지 전하게 하였으며, 정간보를 개량하였고, 오음약보(五音略譜)를 내어 《세조실록》 악보에 실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음악정비 제작사업은 성종 때까지 계속되었고,

특히 성현(成俔)이 찬술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이 출간되어 한국 최초로 독립한 종합 악서(樂書)가 나왔습니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과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는 동안에

조선 초기까지 전하던 삼국시대 및 고려음악은 소멸되고 당악은 쇠퇴하여 향악화되었으며

새로운 향악곡이 생겨 조선 후기 음악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특징

조선 전반기에 세종은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에 자극되어,

악리(樂理)를 연구하였고 박연에게 율관(律管)을 제작시켰고,

유량악보를 발명하였고, 성종 때 성현은 《악학궤범》 같은 독립한 악서를 찬술하여

음악의 학문면에서 큰 발전을 보았습니다.

또 한편 음악 예술면에서는 유교의 예악(禮樂) 사상의 영향을 받아

아악이 중요시되어 아악서(雅樂署)가 독립하였고

당악과 향악의 남녀상열지사도 개산(改刪)되었고, 그 때 특히 향악은 유식한 한문의 가사를 많이 써서

그런 가사에 붙여진 음악도 점차 당악같이 담담해져 조선 전기의 향악은 조선의 백자에 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업송가

태조 2년에 정도전이 〈납씨가(納氏歌)〉, 〈궁수분곡(窮獸奔曲)〉, 〈정동방곡(靖東方曲)〉을 지어 올렸고,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수보록〉 등 신악을 선찬하고 4년에는 하윤(河崙)이

〈근천정(覲天庭)〉, 〈수명명(受明命)〉 등 악장을 지어 올렸습니다.

〈납씨가〉는 고려의 〈청산별곡〉을, 〈정동방곡〉은 〈서경별곡〉의 곡에 가사만 새로 얹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근세조선 창업송가의 제작은 세종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조선 초기까지도 고려 때의 음악을 많이 인용하였지만 유교가 대흥한 세종 때에 이르러서

전조의 음악을 많이 개산하였습니다.

박연·맹사성(孟思誠) 등 음악이론가들을 동원하여 아악을 정비하고 향악을 창작하고 악기를 제작하며

악보를 창안 편찬하는 등 근세조선 음악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당악과 향악

당악은유교 특히 중국의 예악사상(禮樂思想)은 아악의 완성을 촉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악을 재검토시켰습니다.

즉, 송의 사(詞)의 대부분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해서 비판되었고 예외로

〈수룡음(水龍吟)〉, 〈하운봉(夏雲峰)〉, 〈억취소(憶吹簫)〉의 가사만이 초정(稍正)하다 해서

그 곡은 그대로 쓰고 원가사(元歌詞)를 버리고 《시경(詩經)》의 가사를 차용하였습니다.

이런 가사의 개변은 태종·세종·중종 때에 자주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중강조(中腔調)에다 《시경》의 녹명(鹿鳴)의 가사를 붙이는 따위입니다.

향악은조선 전기는 고려조의 음악을 습용(襲用)하였거나, 예를 들면

<대악후보(大樂後譜)>의 <한림별곡(翰林別曲)>, <쌍화점(雙花店)>, <진작(眞勺)>과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의 <풍입송(風入松)>, <야심사(夜深詞)> 또는 고려조의 음악에다가

신제가사(新製歌詞)를 붙이고 곡명을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납씨가(納氏歌)>의 원곡은 <청산별곡>, <정동방곡>의 원곡은 <서경별곡>,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종 때에 <보태평>, <정대업>, <발상(發祥)>, <봉래의(鳳來儀- 前引子, 與民樂, 致和平, 醉豊享, 後引子의 모음곡)>, <봉황음(鳳凰吟)>, <만전춘(滿殿春)의 신악(新樂)>이 제정되고

<세종실록>에까지 그 악보가 기록된 사실입니다.